<다큐3일 72시간 677회, 멸치 날다.> 남해 미조항 72시간, 멸치잡이 배의 72시간, 멸치액젓과 멸치쌈밥, 멸치털기 '진짜배기 일', 김석준 3번 중매인 아들 김규현 13번 중매인, 멸치 공동체, 4인 1조..
<다큐3일 72시간 677회>
멸치 날다.
2021.5월 30일 밤 11시 5분 방송
남해 미조항 72시간
5월, 따뜻했던 봄 날씨가 무더워지기 시작하고, 경남 남해 미조항에서는 비린 바닷바람을 가르는 두 생명체.
하나는 ‘멸치’, 다른 하나는 ‘갈매기’이다.
4월부터 6월까지 석 달 동안만 볼 수 있는 진귀한 풍경의 이름은 바로 ‘멸치털이’, 일렬로 선 어부들이 박자를 맞춰 그물을 털게 되면, 멸치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가고 갈매기들은 ‘하늘을 나는 멸치’를 잡아먹으러 빠르고 분주하게 날아다닌다.
- 어이야 파야, 어이야 차야, 구령에 맞춰 그물을 터는 어부들
미조항은 18척의 어선들이 하나둘씩 멸치를 잡아 돌아오게 되면, 항의 하루도 활기를 띈다. 미조항의 중매인들은 좋은 품질의 멸치를 입찰받기 위해 경쟁하고, 상인들은 부지런히 젓갈을 담고, 식당에서는 손님들에게 멸치회를 대접하기 위해 바삐 움직인다.
이곳은 온 마을이 하나의 ‘멸치 공동체’라고 해도 과언 아닐 정도로 멸치젓갈을 구매하려고 찾아오는 외지 손님들이 많아 1년 중 가장 북적이고 바쁜 계절이다. 멸치에 뭇고 우는 미조항 사람들 이야기가 펼쳐진다.
진한 땀방울을 털어내다. 봄을 털다.
멸치잡이 배는 조업을 마치고 귀항하면 노동이 일단락되는 다른 배들과는 달리 귀항한 뒤부터가 ‘진짜배기 일’의 시작되는데...
멸치잡이 배는 바다에서 멸치를 낚아 올리는 것보다 항구로 돌아와 그물에 걸린 멸치를 털어내는 일이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 2km 길이의 그물을 함께 끌어 올리고 있는 선원들
유자망 멸치 조업을 투망하는데 1시간, 양망하는데 2시간이 걸리고 멸치 터는 데는 무려 4시간이 걸린다.
그물을 털어내면 멸치의 금빛 비늘이 금세 은빛으로 뒤범벅되는 선원들의 얼굴과 몸, 비린내에 괴로울 법도 한데, 선원들은 박자에 맞춰 움직이는 어부들의 몸짓은 ‘만선의 기쁨’으로 생동감이 넘치게 된다.
“힘들어도 멸치가 잘 털리면 기분이 좋고 시원한 느낌입니다.”
오민철/ 금성호 기관장
‘멸치액젓’ 진한 땀방울의 응축
그물에 걸려 있던 멸치들이 하늘을 날고 나면 소금을 만나 젓갈이 된다.
산란기를 맞아 기름기가 오르면 알이 꽉 차 있는 ‘봄멸’ 그물에서 갓 털린 싱싱한 멸치를 소금에 절인 후 ~2년간 푹 삭히게 되면 김장할 때 사용하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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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갈 담그려고요. 젓갈 남해 멸치는 알아주잖아요.”
대구 팔공산 갓바위에서 멸치젓갈 구매하러 온 손님
김장을 위해 내년 또는 내후년에 쓰기 위해 미리 찾아온 손님들로 안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젓갈을 구매하러 온 손님들이 많아지면서 중매인 협회에서 공동으로 마련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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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마다 4월부터 6월까지 하루 평균 판매되는 젓갈은 무려 150여 통.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두고 기다리면 즉석에 멸치를 소금에 버무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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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집 액젓이 제일 맛있다고 하면 기분 좋죠. 그때가 최고죠.”
-김규현/13번 중매인
‘멸치액젓’은 어부들의 땀과 중맨=인들의 노력이 응축된 결과물이다.
매년 이맘때쯤 찾아와 김장용 젓갈을 가득 실어 가는 이들은 한 해 농사를 마친 농부와 같은 넉넉한 마음으로 미조항을 떠난다.
‘멸치인생’ 작다고 무시하지 말라
다른 생선에 비해 크기가 작고 존재감이 없어서 늘 밥상 위의 ‘조연’으로만 여겨졌던 멸치는 남해 미조항에서 만큼은 멸치가 ‘주연’이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생에 있어 버팀목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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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인 1조를 이루어 손질하는 멸치
멸치는 손질이 끝나게 되면 식당으로 옮겨져 ‘멸치회’나, ‘멸치 쌈밥’으로 조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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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오히려 일이 바쁜 게 감사햐요, 모든 걸 잊어버리고 일에 파묻혀서 하다 보면...” - 조민이/65세
조민이 씨는 텃밭을 가꾸다가도 멸치 손질하러 오라는 호출을 받으면 언제든지 달려 나간다. 남해에서 나고 자라 그는 전주에서 시집갔다가 38년 만에 남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부부는 평생 동안 열심히 일하며 바쁘게 살아왔다. 그러나 남해로 돌아와 여유로운 노후를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돌아 온지 3년 만에 남편이 지병을 얻어 세상을 먼저 떠났다.
온종일 일에만 매달려 사는 그를 걱정스럽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오늘도 그는 같은 자리에서 앉아 멸치를 손질하는데...
멸치를 손질하다 보면 사무치는 그리움도 희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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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보기엔 멸치가 작고 값이 얼마나 그러지만 나한테는 아주 큰 존재입니다.” - 김석준/3번 중매인
42년째 중매인으로 살면서 ‘멸치에 웃고 우는 삶’을 살았다는 김석준 씨는 곧 가업을 물려받게 될 아들, ‘13번 중매인’과 함께 매일 위판장에 나가 멸치 경매를 본다. 그는 몸이 아파도 멸치가 나왔다는 말만 들으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단다, 멸치는 단지 ‘작은 생선’이 아니라 ‘삶의 버팀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