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인사이트 > 태평양전쟁의 한국인들, 미군의 포로가 된 조선인들, 히로시마 핵폭탄 '리틀보이', 나가사키 원자폭탄 '팻맨', 사이판과 티니안의 수용소 생활, 영상 아카이브 최초 발굴
<다큐인사이트>
영상 아카이브 최초 발굴 – 태평양전쟁의 한국인들
2021년 9월 30일 밤 10시 방송
KBS 다큐인사이트에서 그동안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을 비롯해 독일, 러시아, 일본 등 세계 곳곳에 나뉘어 보관돼 쉽게 접할 수 없던 한국 현대사 자료를 수집, 공개한 영상 아카이브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020년에는 ‘만삭의 위안부’ 영상의 발굴의 시작으로...
1900년대 한반도의 생활상을 담은 <김씨네 이야기>
한국전쟁 당시 촬영된 영상들을 볼 수 있는 <1950 미중전쟁>
2021년 5월 5.18 민주화운동 아카이브 ,오월의 기록>이 공개됐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태평양전쟁의 한국인들>이 공개된다.
태평양전쟁 한국인들은 태평양전쟁 당시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된 수많은 한국인의 모습이 담겨있고, 당시 강제 동원된 한국인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최초로 발굴된 기록이다. 그동안 태평양전쟁 시기 한국인들의 강제 동원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아직 강제 동원된 인원, 지역, 피해상황 등 총체적인 진살은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태평양전쟁의 한국인들의 공개되면 발판이 되어 역사 진실 규명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길 희망한다.
# 미군의 포로가 된 조선인들
1946년 11월 길버트 제도에 위치한 타라와 환초이었고, 마군의 대규모 함포와 항고기의 무차별 공격이 있었던 곳으로 76시간 동안 이어진 전투로 미군 1,696명이 사망하게 됐고, 장교 1명과 사병 16명을 제외한 모든 일본군이 사망했다.
강제 동원된 수많은 조선인이 희생된 곳이기도 한 이곳에서 길버트에 동원된 저선인 군무원은 1,091명이었고, 전투가 끝나고 150명의 조선이만이 살아남았다.
마셜제도의 콰잘레인도 역시 400~600여 명의 조선인이 구속으로 동원된 지역으로 그 중 165명만이 살아남아 미군의 포로가 되고, 이오지마 역시 일본 해군 군속으로 일했던 한국인들이 미군의 포로가 된 곳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이 타라와 콰잘레인, 이오지마 지역에서 촬영한 기록을 통해 조선인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 사이판, 티니안에서의 수용소 생활
1939년 사이판은 일찍부터 제당 산업이 발달한 곳이며 많은 한국인이 농업 이민의 형태로 동원되었던 곳이다.
1941년 2,775명의 한국인이 머물렀으며 단순 출가자뿐 아니라 아이와 여성을 포함한 가족 단위 출가자가 많아 남양군도 중 가장 많은 한국인이 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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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7월 미군에 사이판과 티니안은 점령되면서 남겨진 한국인들은 각각 사이판수용소와 티니안수용소에 수용됐으며 이들은 수용소 내에서 행정, 교육, 위생, 취사, 등 노동을 통해 미군에게 돈과 식량을 받아 생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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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최초로 공개되는 자료 중 미 해변대가 촬영한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해오던 사진들은 한국인 여성이 수용자들에게 줄 주먹밥을 만들고, 한 쌍의 조선인 부부가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 등 수용소 내 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 전쟁의 끝에
1945년 8월 6일 미국은 태평양전쟁을 끝내기 위해 일본 본토 공격이 필수라 생각하고 일본 히로시마에 인류 최초로 핵폭탄 ‘리틀 보이’, 3일 뒤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 ‘팻 맨’을 투하하였다.
티니안 노스필드 비행장은 미군의 원자폭탄 발진 기지였고, 미군이 티니안을 점령하기 전에 수많은 조선인 일본군의 비행장과 활주로 건설을 위해 동원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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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노무자들은 티니안 사탕수수 농장에 징용돼 전황이 급박해지면서 일본군 군속으로 투입됐고, 포격을 피해 이곳 활주로를 닦았다.
티니안 상륙 후 일본군 비행장을 확장해 공군기지를 만든 미군은 이곳에서 ‘팻 맨’ 원자폭탄을 B-29에 탑재, 나가사키에 투하되는 모습을 촬영해 영상을 남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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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태평앵 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타라와에서 그동안 미 전쟁포로, 실종자 확인국(DPAA)은 유해 발굴 작업을 진행해왔고, 2019년 한국 정부는 DPAA로부터 아시아계 추정 유해 중 유전자 검사가 가능한 145개 세료를 제공받아 유전자 검사를 진행했고, 한 명의 한국인 신원을 확인하게 됐다.
1942년 11월, 25살의 나이에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두고 일본 군속으로 강제 징용된 故 최병연 씨는 2020년 긴 기다림 끝에 유해 봉환이 추진됐으나 신종 코로나19로 현재 모든 작업이 중단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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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타라와 전투에 투입됐던 조선인 군속은 1,200여 명, 생존자 129명을 제외하면 아직도 1000여 명의 희생자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먼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가난한 생활을 견딘 조선인들의 삶이 최초로 공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