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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온 백제 1부>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다

2021년 10월 22일 금요일

[세계유산 백제]

 

백제는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문화적 허브 역할을 하던 핵심 국가

 

- 지난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

 

백제의 역사는 한반도를 넘어 인류의 문화 자산이 되었고, 백제의 어떤 면이 세계인을 자리잡았나?

백제 문화의 가치와 동아시아 교류사 속의 위상을 짚어본다.

 

 

# 위태로운 정세 속 국가의 터전을 닦은 공간, 공주 공산성

백제는 475년 개로왕 때에 고구려의 침공을 받게 된다. 급하게 피난처로 삼게 된 곳은 차령 너머 웅진(공주)였고, 백제는 옹진을 도읍으로 삼고 공산당을 쌓았다.

부쪽, 동서쪽은 금강 자연방어선으로 삼고 산 능선을 따라 견고하게 성벽을 쌓아 천혜의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한성기 몽촌토성과 사비기 부소산성 동일한 입지 2.4km의 동일한 규모를 보이고 있는 공산성 한성 도읍 시기 백제의 문화적 기반은 위급한 정세 속에서 도 그대로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다.

위기 속에서 새롭게 국가의 터전을 닦고 백성들에게 안정감을 주려당시의 상황이 공산성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

- 삼국사기 -

 

 

백제의 문화의 핵심의 옛 기록이다.

아담한 규모의 공산성 내 왕궁 추정지에서 발굴 작업이 한창이었다.

공산성 내에서 발견된 연화문 와당 등 장식 기와들은 궁, 사찰, 종묘에서만 사용되는 것으로 이 곳 역시 왕궁으로 추정된다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일본 나라현 아스카 마을에서 발견된 기와는 백제 연화문 기와와 흡사한 디자인과 입체가믈 보여주고 있고, 일본의 첫 번째 불교사찰인 아스카데라를 설립할 떼 백제에서 와박사 (기와 전문가)4명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의 문화를 받아들인 일본의 아스카 시대의 문화는 화려하게 꽃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도시 전체를 성벽으로 두른 최초의 사례, 부여 나성

 

백제는 성왕 때 사비(부여)로 천도하며 또 하나의 결단을 내리게 된다.

그 당시에는 아무런 기반 시설이 없었던 사비에 성왕이 천도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비는 웅진에 비해 넓은 들판을 가지고 있었고, 백마강이 있어 해외 진출, 교류에 유리했고, 가야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북방의 영토를 상신한 백제는 사비를 통해 백제 부흥에 원대한 꿈을 꾸었다.

 

 

“사비 천도는 백제의 북방 영ㅇ토 상실과 더불어서 그걸 보완할 수 있는 나름의 신 국토 정책, 신 국방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 박순발 충남대 고고학과 교수 -

 

 

부여의 관복리 유적은 왕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가장 유력한 증거로 동서 35m, 남북 18.5m의 대형 건물터와 정연한 직선 도로의 흔적과 수로, 나무와 돌로 된 대형 저장고 등도 발견됐다.

저장고 안에서는 복숭아, 참외, 살구, 다래, 오이 등의 씨앗이 다량 출토되었으며 고구려 침입으로 급하게 천도했던 웅진과는 다르게 사비도성은 철저한 계획도시로 각종 도시 기반시설이 체계적으로 건설됐다.

 

 

사비의 방어시설 또한 계획도시인 만큼 완벽에 가까웠다.

왕궁의 바로 뒤로 부소산성을 쌓고, 방어 기능을 하게 함과 동시에 유사시 대피장소로 삼기도 했다. 사비도성의 방어 체계를 보여주는 특별한 유적 나성은 도시의 외곽에 또 하나의 성을 쌓아 2중 방어선을 구축했던 것이다.

한반도 역사에 주민이 사는 전체 도시를 성벽으로 두른 첫 번째 기록이었다.

 

 

# 일본에 전해진 백제의 뛰어난 건축 기술

백제인들은 성을 쌓는 기술 또한 뛰어나 부엽 공법과 판측 기법을 사용했다.

부엽공법은 나뭇잎, 가지 등을 점질토와 함께 바닥에 깐 다음 성을 쌓는 기법이다.

 

 

판측 공법은 마무판자와 기둥을 이용해서 틀을 짠 마음 흙을 쌓아올리는 기법으로 백제의 토목기술의 뛰어난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인의 건축 기술은 바다 건너 일본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 후쿠오카 외관 다자이후는 664년 설치된 지방 행정부로 다지이후의 도시 구조는 사비와 유사하고, 다자이후 관청의 배후에는 산성인 오오노조와 키이조가 있고, 외곽에는 토성 미즈키가 있다.

이는 왕궁 뒤에 배후산성인 부소산성을 배치하고 외곽에 나성을 쌓았던 사비성과는 동일한 구조였다.

미즈키에서 사용되었던 축조법 역시 백제의 판축 공법과 부엽 공법이 동일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뛰어난 금속 공예 기술과 사상의 극치, 금동대향로

우리가 왜 금동대향로 백제 문화의 아이콘이라고 마하느냐, 거기에는 백제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사상이 반영되어 있어요. 도교적인 것, 불교적인 곳, 음행오행과 같은 사상이 녹아 있는데 그 사상이 서로 충돌하니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죠.” -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 교육과 교수 -

 

 

1993년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금동대향로는 당시의 백제 금속 공예 기술과 백제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사상이 어우러진 백제 시대 최고 걸작을 꼽히고 있다.

연꽃봉오리 형태로 위에는 봉황이 올라앉아 있고, 아래는 용이 받치고 있는 형태에 뚜껑에는 산봉우리가 층층이 겹쳐진 사이 36마리의 상상의 동물 악기를 연주하는 5명의 악사, 신선 17명 등 이 표현되어 있는 백제문화의 절정인 금동대향로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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