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다큐멘터리 3일>광주 고려인 마을 72시간, 고려인 마을 지원센터 대표 신조아, 광주 월곡리 고려인 마을, 텐 올가의 가족카페,
꿀이꿀이 2021. 12. 5. 20:06<다큐멘터리 3일>
우리가 꿈꾸던 고향, 광주 고려인 마을 72시간
2021년 12월 5일
“대한민국이여, 우리 조국이여 이해해 주소서, 우리가 멀리서 살았던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님을”
김 블라디미르 <회상 열차 안에서>

러시아 민속 노래를 부르는 고려인 마을 어린이 합창단
일제강점기에 러시아 연해주로 넘어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우리 동포들은 “카레이츠‘라 불리는 그들은 1973년 우즈베키스탄 타슈겐트와 카자흐스탄 등지의 중앙아시가 곳곳에 강제로 이주 당하여 역사 속으로 잊혀져갔다.
고려인들은 소련의 민족어 사용금지 정책으로 인해 고국의 언어, 문화도 점차 기억에서 희미해졌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들려주던 아름다운 고향의 이야기들은 80여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았다.
낯설고도 가까운 고향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고려인들의 72시간을 담는다.

-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 마을 특화 거리, 다양한 나라의 상점들이 모여 있다.
이리로 오라,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고려인 마을 종합지원센터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에 위피하고 있는 이곳은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 7천여 명을 품어주는 둥지이자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상담소이다.
센터의 대표 신조아(66세) 씨는 국적을 불문하고 찾아오는 ㅁ든 이들을 환대하고 음식을 대접하기에 바쁘다.
그녀를 마을이 ‘대모’로 통하며 오랜 시간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고려인들이 한국에 정착하도록 돕고 있다.

“한국에 들어와서 사는 동안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우리 부모님들은 남의 땅에 묻혀 있지만, 우리 고려인 3세는 지금 이곳에 남아있으니까. 뿌리를 뽑아 여기에 돌아온 느낌이에요.” - 신조아/고려인 마을 지원센터 대표
신조아 대표는 의사소통이 어려워 혼자서 병원도 가지 못하는 어르신부터 이제 막 한국에 들어와서 자녀가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찾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부모, 부푼 꿈을 안고 돌아온 고려인들이 예상하지 못한 고행 앞에 무너지지 않도록, 어떤 조건도 없이 기꺼이 이야기를 들어주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준다.
이렇게 모든 것을 잃고 황무지에 버려져도 억척스럽게 살아남은 고려인들은 고국의 땅에서 서로의 상처를 감싸 안고 새로운 터전을 일궈 가는 중이다.

- 센터에 모여 김장 준비를 하는 마을 사람들
그럼에도 아름다운 이곳, 아버지의 고향
김 블라디미르(66세) 씨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문과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던 교수로 마을에 미디어센터가 생긴 이후로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고려인들이 들을 수 있는 라디오 방송을 진행한다.

“나는 알지, 내가 아버지와 꼭 닮아다는 사실을 아버지의 나라에 살고 있어 나는 행복하다네, 그리고 그때 울던 분들의 눈물을 이해한다네, 그분들께 한반도는 바로 기억이자 사랑이었음을.” - 김 블라디미르 <사람들은 말하지> 중
2012년 우리나라로 들어온 그는 배와 감을 따며 일용직 노동자로 생활했고, 간암 선고를 받고 고된 육체노동을 할 수 없어지자 쓰레기 단속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겨울이 오면 고용해주던 곳이 없어 집 안에서 하루 종일 시를 적어 내려가고, 그가 한국에 들어와 처음으로 쓴 시, 광주에 내린 첫눈을 보며 난생처음 만나 고향 땅에서 아름다움을 기록한 글이었다.
친구와 친척들이 있는 우즈베키스탄이 때로는 그리웠지만, 그는 단 한 번도 한국에 온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고 한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누눈물을 흘리면서 부르던 고국의 노래 속에 담겨져 있는 절절한 그리움, 아름다움을 떠올리며 그는 길을 잃고 방랑하는 동포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전하고 있다.
더 멀리 가기 위해 뿌리를 내린다.
텐 올가는(35세) 씨는 고려인 마을에서 가족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세 자녀의 엄마이다.
그녀는 일을 마친 저녁 4개월 된 막내를 어르고 달래며 한국어 공부에 전념하고 있다. 올가의 가장 큰 목표는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것인데 아이들에게 한국 국적을 물려주기 위해서란다.

“우리의 꿈이에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예요. 아이들이 어딘가에 부리를 내리고 살았으면 해요. 아무도 한국인과 차별할 수 없었으면 해요.” 텐올가/ ‘ㄱ’음식점 사장님
“작은 눈, 네 나라로 돌아가라”
그녀는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남들과 다른 이방인 취급을 받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피해 조부모님의 고향으로 오게 되었다.
그런 그녀는 한국어 한마디를 제대로 할 수 없어 이곳에서 마찬가지로 ‘외국사람’일 뿐이었다고 한다.
올가 씨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그녀는 이제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이곳에서 뿌리 내려 살아가고 있다.
아이들이 완벽한 한국인으로 자라나 차별받지 않고 꿈을 펼치는 그 날까지 올가 씨는 엄마와 학생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희망을 개척했다.

- 광주 월곡리 고려인 마을 전경
고려인들은 강제로 이주해야했던 후손들은 1991년 한러수교 이후 고향을 찾아 자발적으로 이주를 시작했고, 올해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160년을 유랑해오던 고려인들이 꿈꾸던 고향에 정착할 날을 기다린다.